일상다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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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일상다반사 2017. 10. 9. 23:00
1.나는 새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열흘 연휴를 그야말로 하는 일 없이고스란히 날려 먹었다. 시간은 참 잘도 빨리 쏜살같이 지나가더라. 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많았으니,그만큼 연휴의 마지막 날이 겨우 2시간도 안 남은 지금절실한 감정은 자탄 뿐이다. 그런데, 본능에 충실한 일만 했으니, 이게 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 나와 이런 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거. 10대도 아니고 50대인데...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Brad's status)에서 브래드에게 아들 친구가 이렇게 물었지."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자신에게 어떤 얘기를 해 주고 싶으세요?" 이런 연휴를 보내놓고 보니,20대의 나를 만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 자신을 의지박약하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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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일상다반사 2017. 9. 30. 22:44
1. 긴 추석 연휴의 첫날.2008년 시작한 이래 한번도 바꾸지 않았던 블로그의 스킨을 바꿔봤다.그래봐야, 기성품으로 무료제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 내 마음대로 서체를 바꾸거나 사진을 넣을 수도 없지만, 연휴에 해야할 일로 꼽아놓았던 것 중 제일 손쉬운 일 하나를 끝냈다. 어두운 배경이 답답해, 밝은 색으로 바꾸었다.휑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 당분간은 여기에 익숙해져 보기로 한다.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청소를 하고 싶었던 거니까...기분으로라도... 2.연휴 동안 하겠다고 적어 놓았던 일을 다 하려면 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 같다. 우선은 사 놓고 제대로 들춰보지 못한 책들을 줄 세워 보았다.몇 페이지씩만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그냥 잠시 이 책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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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들의 삶일상다반사 2016. 12. 11. 20:32
1."누구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격도 타인의 몇몇 인격을 모방해서 합성한 것이다.그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정말로 작은 조각 같은 단편적인 것이, 단지 맥락도 없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이것도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같은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 그러냐하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별 볼 일 없고, 대단치 않고,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나간 인생 속에서 진절머리 날 만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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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탕수육일상다반사 2015. 9. 3. 20:25
1.학교 클럽활동으로 레슬링을 하는 아들이 어깨를 다쳤다.첫날 엑스레이를 찍어본 동네 병원에서 "뼈를 다쳤을 지 모른다.3일 정도 경과를 보자"고 한 탓에 다친 지 3일째 되는 오늘, 수업이 끝난 아이를 데리고 종합병원 정형외과를 찾았다.젊은 담당의는 처음엔 "쇄골이 탈골 된 것 같다"며 엑스레이를 찍어본 뒤 수술 여부를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사진을 찍어보고 아이에게 아픈 부위를 자세히 설명듣고 나더니, 수술은 커녕 따로 보정치료도 필요 없겠다고 한다.점심 급식을 두 차례나 타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뭐 먹을래?" 하니 대번 "짜장면" 한다. 은근히 머리를 누르던 아이의 아픈 어깨 걱정도 내려놓고, 마치 수업 땡땡이 치고 분식집 가는 기분으로 아이가 "친구들이 맛있다고 하던데 비싸서 한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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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짐 싸는 날일상다반사 2015. 8. 19. 01:55
1.짐을 싸는 아이는 넣었던 짐을 다시 빼고 넣기를 반복하는데, 나는 그만 지쳐 내 방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많은 짐들을 들고 먼 길을 갈 생각을 하니, 이제 이렇게 네 앞에 생이 펼쳐지는구나 싶기도 하다. 짐을 줄여야지, 그래야 단촐한 여행이 되지 하는 다짐은 그저 다짐일 뿐, 펼쳐놓은 짐 위에서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가 열여덟살 아이의 삶에도 벌써 붙어버렸는지, 너도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혀를 끌끌차게 된다.이고지고 가더라도 예쁜 것은 다 챙겨야 하는 나이.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을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머리 깎고 도 닦으러 들어가야할 하늘이 내린 재목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보통 아이답게 자라는구나 한다. 2. 지난 몇 주간, 유난히 기저귀를 차서 엉덩이가 터져나갈 듯 빵빵한 꼬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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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일상다반사 2014. 9. 21. 23:47
1.배고픈 예술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아니 배부른 예술가도 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그건 신이 건드려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거든.기껏해야 동네 피아노학원, 미술학원에서 재능잔치 정도 벌이는 아이들도 다 어미새 소리 흉내내는 새끼참새처럼,피아니스트가 될래요, 발레리나가 될래요, 화가가 될래요, 그렇게 얘기하던 꼬마 때도 나는 "절대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어.딱 금을 그어놓고 거기까지만, 그러니까 예술가가 될 수 있을만큼의 신명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냥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있기로 했던 거지.그건 아주 아름답지만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았거든.나는 아름다운 건 아는데 만들 수는 없는 사람일 거라고, 그러니까 누에가 실을 잣는 것처럼 그렇게 예술이 내 안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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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일상다반사 2014. 9. 11. 01:19
1."좋아요." 타루가 말했다.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중략)..."결국....." 의사는 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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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을 읽는 밤일상다반사 2014. 2. 16. 23:37
1.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메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윗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어 보며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과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산숙(山宿, 1938년) 2.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내 블로그를 열고 들어오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새로 설정을 해야했다. 백석이 견뎠던 북방의 살을 에는 추위는 지나간 듯 하지만아직 봄은 오지 않은 밤.백석 시 전편을 묶은 책 '백석을 만나다'(이숭원 저)를 이리저리 앞 뒤로 들춰가며 읽는다. 나는 가 본 적도, 그리고 제대로 된 그 고향 사투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평안북도 정주 땅에서 태어난 사내.동향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