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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의 마지막 날
    일상다반사 2017. 9. 30. 22:44


    1. 

    긴 추석 연휴의 첫날.

    2008년 시작한 이래 한번도 바꾸지 않았던 블로그의 스킨을 바꿔봤다.

    그래봐야, 기성품으로 무료제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 

    내 마음대로 서체를 바꾸거나 사진을 넣을 수도 없지만, 

    연휴에 해야할 일로 꼽아놓았던 것 중 

    제일 손쉬운 일 하나를 끝냈다.


    어두운 배경이 답답해, 밝은 색으로 바꾸었다.

    휑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 당분간은 여기에 익숙해져 보기로 한다.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청소를 하고 싶었던 거니까...

    기분으로라도...






    2.

    연휴 동안 하겠다고 적어 놓았던 일을 다 하려면 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 같다.


    우선은 사 놓고 제대로 들춰보지 못한 책들을 줄 세워 보았다.

    몇 페이지씩만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냥 잠시 이 책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나오는 것,

    어슬렁어슬렁...


    보고 싶은 영화의 시간표도 챙겨 보았다. 
    상영기간을 놓쳤는데 다시 상영이 시작된 '내 사랑(Maudie)'을 오늘 자정에 볼 것이고,
    곧 내릴 것임에 틀림없는 'invisible guest'와 '괜찮아요 미스터 브레드(Brad's status)'도 가능하면 보려한다.

    여성학자 친구가 강추한 '아이 캔 스피크'는 그래도 조금 오래 걸려 있겠지 하는 생각에 후순위로 미룬다.   

    가까이서 더 이상 상영관을 찾을 수 없는 '공범자들'은 다운로드해서 볼 거다.


    그 다음은 책장과 옷장 정리.
    부엌 찬장 정리

    빈 공간이 생길 수 있도록 비워내고 싶다.


    와중에 조금의 차례음식 준비.


    무엇보다도 수업 준비.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분주했고, 이렇게 학기를 시작해선 안 되는데 하면서도, 쫓기며 부실하게 4주를 보냈다.

    연휴가 시작되어 부족했던 수업준비를 벌충할 수 있기만을 기다려왔다. 


    이 일을 얼마나 오래할 지는 알 수 없지만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소중하다.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일이다.
    어물쩡 눈속임으로 넘어갈 때도 있지만, 나를 다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할 수 있을 때, 학생들과 잘 가르치고 가르침 받고 싶다.


    이 모든 일을 하려면, 내가 새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하루가 48시간이 되지 않으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3. 

    10월이 시작되니 마음이 뒤숭숭하다.

    생일이 다가오면, 갑작스레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듯, 내가 뭘하고 살았는가 우울해지기도 하고, 

    하나마나한 결심도 새로 해 보게 된다.

    지난해 이맘때 쯤 무슨 글을 썼던가 뒤져보며 아무 변화없음에 낙담하기도 한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어떤 속도로 흘러가든, 무슨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하든, 

    나는 그 속에 적막한 어떤 한 공간을 갖길 원하고, 

    무게중심을 잃지 않았으면 하지만, 

    내 다짐의 허약함 때문에, 

    혹은 내가 세상과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깃털같은 바람에도 쉽게 무게중심을 잃고, 

    사소한 걱정과 자잘한 분노 때문에 소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살아서는 이 진창을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그래서 진창 속에서 노래 부르고, 시를 읽기로 한다.

     

    4.

    오늘은 이 시가 좋았다.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를 느낀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 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숨겨진 모티프가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엎질러질 염려가 없다.


    가족 중에 시 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그런 가족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나왔다면 한 사람으로 끝나진 않는다.   

    때때로 시란 가족들 상호간에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세대를 관통하여 폭포처럼 흘러간다.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년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이야기해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 시선집 『끝과 시작』 중)


    5. 

    10월의 첫 날인 내일은 동네의 낮은 산이라도 걸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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