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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 클럽활동으로 레슬링을 하는 아들이 어깨를 다쳤다.
첫날 엑스레이를 찍어본 동네 병원에서 "뼈를 다쳤을 지 모른다.3일 정도 경과를 보자"고 한 탓에 다친 지 3일째 되는 오늘, 수업이 끝난 아이를 데리고 종합병원 정형외과를 찾았다.
젊은 담당의는 처음엔 "쇄골이 탈골 된 것 같다"며 엑스레이를 찍어본 뒤 수술 여부를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사진을 찍어보고 아이에게 아픈 부위를 자세히 설명듣고 나더니, 수술은 커녕 따로 보정치료도 필요 없겠다고 한다.
점심 급식을 두 차례나 타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뭐 먹을래?" 하니 대번 "짜장면" 한다.
은근히 머리를 누르던 아이의 아픈 어깨 걱정도 내려놓고, 마치 수업 땡땡이 치고 분식집 가는 기분으로 아이가 "친구들이 맛있다고 하던데 비싸서 한번도 못 가 보았다"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2.
점심과 저녁 영업 사이에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식당문을 열고 들어선 첫 손님이라, 아이 몫으로 짜장면 한 그릇만 달랑 시키기가 미안했다.
남으면 싸 갖고 가겠다며, 탕수육 한 그릇과 짜장면 곱배기 하나를 시켰다.
그렇게 우리 모자가 시킨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쇼핑을 마쳤는지 불룩한 종이봉투를 든 중년부인 두 사람이 들어와 또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키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과 엄마도 들어와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키고, 수업을 마친 인근 고등학교의 여고생 둘이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안 맵게 해 주세요"라며 해물쟁반짜장을 시켰다. 마침내 우리 모자 옆 자리의 식탁에도 노부부가 앉으셨다.
거동이 불편한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중국집 앞에 까지 오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의자에 앉힌 뒤 문밖에 세워두었던 휠체어를 접어 옮기고, 다시 의자에 앉은 할머니의 자세를 편안하게 잡아준 뒤 메뉴를 펼쳐 보셨다.
"짜장면 먹을래요?"
할아버지의 질문에 할머니는 웃음 띤 얼굴로 "응,응" 하신다.
할머니는 안 매운 유니짜장, 할아버지는 매운 맛이 나는 해물쟁반짜장.
주문을 마친 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다음 일정을 차근차근 설명하신다.
"오늘 분수대에 물이 나온대. 7시반까지... 그러니까 이거 먹고 오늘은 거기까지 운동하고 가는 거예요"
"응,응"
"이게 저녁밥인 거야."
"응,응"
3.
아들이 그릇 하나를 더 달라고 해서 곱배기 짜장을 내게 나눠주었다.
열일곱살 아들은 손이 곱게 생겼다.
여자 손처럼 가늘고 곱다.
언젠가 친구녀석들과 떼로 몰려가 '무한 고기리필'이라는 고깃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이렇게 손이 예쁜 사람이 고기를 자르면 안 된다"며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고기를 다 잘라 주셨노라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무슨 말을 해도 "예, 아니오" 가 전부일 때가 많고,
제가 항의할 일이 있을 때 빼고는 긴 말을 하지 않는 아이라,
딸과는 달리 아들과는 그닥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왔다.
딸 말에 따르면 "쿨해 보이려고" 그렇게 말을 적게 하는 거라나.
아이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아들은 그런 존재려니 해왔다.
말로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그 곳에 있는 것으로서 이심전심하는 사이.
그래도 큰 애가 떠나고 졸지에 외아들이 되고 보니,
이 녀석이 그 동안 첫째에 가려 없는 듯 지내온 구석이 많구나 싶다.
아침에 아이가 학교에 갈 때면 애비에미 두 사람이 다 현관에 나가서 서성거린다.
그런 넘치는 관심이 저도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내가 받았던 교육이 그런 것이라, 아이들에게도 "사랑한다" "예쁘다" "잘 했다" "자랑스럽다" 그런 말들은 그냥 속으로 아끼고,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려니 했다.
사랑도 너무 많이 주면, 물 많이 먹은 화초가 뿌리부터 썩듯이, 그렇게 아이를 망칠 수 있다고, 적이 두려워했었다.
그런데,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었다던 사람이 있던가.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아마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4.
soul food라고 하지.
그냥 언제 먹어도, 그걸 먹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나는 거.
MSG 덩어리니 뭐니 해도 탕수육하고 짜장은 늘 그런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짜장이 "잘 했어" 혹은 "괜찮아, 괜찮아"하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거라면, 탕수육은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엄청나게 큰 상장을 받는 것 같은 기분.
걱정과 달리 어깨를 다치지 않은 아들과
별말없이 나눠먹은 탕수육과 짜장면.
아들한테도 '참 잘했어요" 도장을 수십개쯤 받은, 상장같은 시간이었을까.
아프지 않고 이렇게 커 주니 얼마나 고마우냐.
손가락이 예쁘고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무거운 생수통을 번쩍번쩍 드는 내 아들.
살면서 이렇게 우리 모자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나눠먹을 일이 얼마나 잦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