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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짐을 싸는 아이는 넣었던 짐을 다시 빼고 넣기를 반복하는데, 나는 그만 지쳐 내 방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많은 짐들을 들고 먼 길을 갈 생각을 하니, 이제 이렇게 네 앞에 생이 펼쳐지는구나 싶기도 하다. 짐을 줄여야지, 그래야 단촐한 여행이 되지 하는 다짐은 그저 다짐일 뿐, 펼쳐놓은 짐 위에서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가 열여덟살 아이의 삶에도 벌써 붙어버렸는지, 너도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혀를 끌끌차게 된다.
이고지고 가더라도 예쁜 것은 다 챙겨야 하는 나이.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을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머리 깎고 도 닦으러 들어가야할 하늘이 내린 재목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보통 아이답게 자라는구나 한다.
2.
지난 몇 주간, 유난히 기저귀를 차서 엉덩이가 터져나갈 듯 빵빵한 꼬마 여자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어제는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앞계단에 선 두세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꼬마 여자 아이와 학생처럼 백팩을 맨 젊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염탐하듯 귀기울여 들었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무언가를 제안하고, 아빠는 협상안을 내놓고...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다리가 튼실했다. 얼마나 튼실했으면 시이모님이 그것도 덕담이라고 얘는 골프를 시키라고 했을까. 그 튼실한 다리가 사춘기부터는 딸아이의 맹렬한 고민거리가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기저귀를 찬 빵빵한 엉덩이와 통통하게 살오른 넓적다리 종아리로 또박또박 걸으며, 계단이라도 오를라치면 다부지게 "영차" 호령을 하면서 한발씩을 내딛던, 막 말문이 터졌을 무렵의 딸아이의 모습을 늘 눈 앞에서 재생시킬 수 있다.
가끔은 날이 따뜻하면 아침 출근길에 아이 보시는 아주머니가 집 앞 지하철 역 계단 입구까지 아이를 데리고 동행해 주셨다. 매표소까지 내려오지는 못하고, 계단 몇개를 내려오다가 중간에서 빠이빠이를 했지만, 나는 돌아서서 "영차"하며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아이의 모습을 무슨 긴 이별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돌아보며 가슴에 물기가 맺히곤 했다. 저녁이면 만날 사이인데도, 애틋한 것. 그건, 24시간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일하는 엄마의 애틋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우리 인생에 아주 잠깐 지나가는 예쁘고 귀한 시간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각, 너무 귀한 데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을 본능이 먼저 아는 애틋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3.
부모란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애가 뭘 잘 못하는지만 눈에 보이지만, 혼자 있으면 내가 뭐가 부족한 사람인지만 떠오르는 자리인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생각 다르고 행동 다른 사람인지, 얼마나 제 인생을 자식 인생에 덮씌워 살려고 하는 욕망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지, 가치있는 삶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온 줄 알았는데, 정작 바라기는 편안한 인생이었다는 표리부동, 이런 모든 것들을 자식하고의 악다구니 속에서 슬쩍 비껴가지도 못하며 마주친다.
참 부끄럽다. 참혹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자식 키우면서 사람살이 이치를 깨친다는 게 이런 거라면, 알고는 하겠다고 선뜻 못 나설 일 같다. 그저 모르니까, 겁없이 부모가 되고, 부모가 된 뒤에야 부모노릇을 머리가 터지게뭐든 배워나간다.
아무리 부모노릇을 열심히 했어도, 그 마지막 단계는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생명으로 떠나보내는 것, 아이가 세속적인 기준으로 성공했든 실패했든, 나와 비슷하든 다르든, 그 자체로 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갈 길을 가도록 빌어주는 것일 것 같다.그렇게 어렴풋이 생각이 든다는 것 뿐, 그럴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금의 내 깜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4.
함께 안경을 고르러 가서 딸아이는 이 안경 저 안경을 수십번 써 보며 "이거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멀리 아이를 세워놓고 안경 쓴 모습을 보아주려니 문득 '아, 쟤가 이제 여대생이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느닷없이 머리를 쳤다.
여.대.생.
지금도 내가 건너온 지 얼마 안 되는 것 처럼 생각하는 시절. 심장에 화인이 찍히듯 또렷이 새겨져, 그 후로도 몇십년간을 건너오지 못했던 인생의 어떤 시간.그 시간으로 지금 저 아이가 들어가는구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진부한 엄마답게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만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제 다시 없을 시간을 살아갈 거다.
부모의 어떤 선행지도없이도 제가 부딪쳐 살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시간을 살기를,아픔을 겪더라도 강인해지기를, 혼돈 속에서 지혜로워지기를,
그렇게 짐을 싸는 아이를 지켜보며 마음 속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