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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새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열흘 연휴를 그야말로 하는 일 없이
고스란히 날려 먹었다.
시간은 참 잘도 빨리 쏜살같이 지나가더라.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많았으니,
그만큼 연휴의 마지막 날이 겨우 2시간도 안 남은 지금
절실한 감정은 자탄 뿐이다.
그런데, 본능에 충실한 일만 했으니,
이게 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 나와
이런 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거.
10대도 아니고 50대인데...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Brad's status)에서
브래드에게 아들 친구가 이렇게 물었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자신에게 어떤 얘기를 해 주고 싶으세요?"
이런 연휴를 보내놓고 보니,20대의 나를 만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 자신을 의지박약하다고 생각하든,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하든,
지금의 네가 너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세상에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야.
끔찍한 저주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그냥 그런 거지.
2.
연휴 동안 거의 미친 사람처럼 했던 일은
여행계획을 짠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불이 붙은 것인지 모르겠다.
추석이 지난 이튿날이었던가.
갑작스레 여행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 나흘동안 그 동선을 짜느라 몰두해서
지금은 여행을 다녀온 것만큼 피곤하다.
비행기표를 사 버렸으니,
내년 1월, 살아있다면, 그리고 정말 엄청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스페인에 가 있을 것이다.
꼭 스페인이었어야할 이유도 없고,
꼭 1월이었어야할 이유도 없다.
(항공료가 싸다는 실질적인 이유는 있다)
다만 어디론가 가고 싶었고,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여행 예정지의 정보들을 보고,
호텔방을 검색하고,
기차와 비행기의 이동시간을 들여다보고 하는 일들로,
하루는 밤을 꼬박 새기까지 했다.
읽어야할 논문들은 팽개쳐두고,
수업준비도 팽개쳐두고,
마치 술을 끊어야지 하는 알코올중독자나
약을 그만해야지 하는 마약중독자처럼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여행 계획 짜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연휴가 끝나니, 이제 겨우 그 중독이 멈춰질 것이다.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고 있다고 엄청난 guilty를 느끼면서도,
내가 미친듯이 몰두했다는 것을,
기억은 하겠지만,
기록해두고자 한다.
3.
그러면 내가 방랑자로 살 사람인가?
여행을 계획하는 자가 방랑자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방랑자는 그냥 떠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사람일 것이다.
4.
이 블로그의 어디쯤엔가,
2017년 2월에는 리스본에 가 있을 것이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페소아를 읽은 직후였다.
의지박약하고 우유부단한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뭔가를 계속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근처까지는 가는 모양이다.
1년이 지나, 포르투갈이 아닌 스페인까지는 갈 모양이니...
그렇다면, 계속 뭔가를 마음 속에 그려볼 필요는 있는 것일까.
5.
그저 구경이나 하려는 사람일 뿐,
깊이 무엇엔가 나를 투신할 수 없는 사람이 나인데,
아니 어쩌면 그래서,
자기 앞에 던져진 상황에 깊숙이 자신을 담그는 사람들을 보면,
또 guilty가 심하게 작동한다.
(죄책감이라는 말이 있건만,
잘하지도 못하면서 영어의 guilty가 내 감정을더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은 왜인지...)
의지박약하고 우유부단하고 회의가 많은 내가
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삶들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막연해진다.
진정성이란 말이 참 너덜너덜해진 세상에 살고 있지만,
방심하고 있는데 명치를 강하게 한방 맞는 것처럼
혹은 머리 위로 얼음물이 쏟아진 것처럼
그렇게 얼어붙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끝없이 벽에 부딪치면서도,
'원인의 원인(the causes of the causes)'을 찾는 사람들.
우연히 던져진 상황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사람들.
내게 그런 생각거리를 던진 일들에 대해 길게 쓰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에너지도 바닥난 상태.
아니, 생각을 길게 펼쳐놓을 수 있는 정신의 근육이
무너진 상태라 뭘 조리있게 적지 못하겠다.
그냥 나를 둔탁하게 치고 간 말들을
밑줄긋기처럼 적어둔다.
'... 제 연구가 이 세상을 마주하는 저의 방식이라면,
그 무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오토 노이라트가 말했던 것처럼요.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김승섭 저 '아픔이 길이 되려면' 83쪽)
"우리 싸움의 의미요? (옅은 웃음)
저는 기록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적어도 이런 암흑의 시기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봐요.
물론 이 한 10여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싸웠던 많은 사람들의 어떤 청춘, 인생,그건 다 날아갔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봐요.
저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적어도 그 기간에
우리가 침묵하지 않았다...."
(영화 '공범자들' 중 암으로 투병 중인 이용마 MBC 해직기자의 말)6.
늘 그러했던 것처럼,
구멍이 숭숭난 채로,
매듭짓지 못한 것들을 손에 쥔 채로
내일을 맞을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또 내일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